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가 살짝 흔들리고, 덜 여문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사이로 놀란 참새들이 소란스럽게 날아오르고, 자기 몸보다
커다란 책가방을 등에 맨 꼬마아이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걷는 엄마를 재촉하고, 앞을 안보고 달리는 초등학생을 급하게 피하는 아저씨의
허리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는 아침.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깨져서 조금 한가해졌다. 애들 일하는 사무실에서 멍 때리는 것도 진상스러울 것 같고, 맛있는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자주 들리던 커피숍으로 향했다.
이 커피숍은 커피 맛도 좋지만, 점장님이 아주 미인이라서 자주 들렀었다. 언젠가부터 점장님이 오전에는 자리를 지키지 않고 알바생만
있어서 한동안은 오후에만 들렀었는데, 요즘에는 오후에도 그 미녀 점장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었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항상 들리던 인사가 들리지 않아서 두리번거렸다. 카운터에 아무도 없어서 가게 안쪽에 건물 뒤편으로 연결된
흡연실로 갔더니, 흡연실의 테이블 위에 미녀 점장님이 엎어져 있었다. 흡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리를 듣고 점장님이 테이블 위에서 힘겹게
허리를 들어 인사했다.
“으... 죄송해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커피요? 잠시 만요. 우...”
“별로 안녕해 보이시지 않는데, 천천히 하세요.”
“예... 어제 좀 과음을 해서요. 우욱”
“네. 설명 안하셔도 알 것 같아요. 천천히 하세요.”
“오전 알바가 갑자기 펑크를 내서요. 우으...”
“네네 설명 안하셔도 괜찮아요. 충분히 힘들어 보이세요.”
“으...”
이 사람이 곧 일어나서 내가 주문하는 커피를 준비해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시 테이블 위로 쓰러질 것이라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평소처럼 보기 좋은 검은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갈색 앞치마를 두른 미녀 점장님이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그냥 나가서 다른 커피숍으로
향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런 광경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조금 관찰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에 취해있는 미녀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음악도 없는 커피숍에 내 입술에 문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잔잔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테이블 위에 쓰러져있는 점장님의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조금씩 살아있는 사람의 흉내를 내던 손가락이
점점 많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테이블 위를 긁었다. 몇 번 더 테이블을 긁던 점장님이 다시 힘겨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날 봤다.
“으... 안녕하세요.”
“네.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제가 어제 좀 과음을 해서요. 우으...”
“오전 알바가 출근을 안했죠.”
“제가 어제 과음을 해서 오전 알바가 출근을 안 한 건 아니고요. 우...어떻게 아셨어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점장님이 일어날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뭔가 간절한 눈으로 날 보는 것 같았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일어나서 컵에 물을 따라 점장님에게 가져다 줬다. 내 친절에 감동한 눈빛이 역력했다. 감격스럽다는 몸짓으로 물을 마시고 힘겹게 일어나서 흡연실을
나가기에 나도 따라 나섰다.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서서 멀쩡한 척 하기에 커피를 주문했다. 카드를 내밀었더니, 내 카드를 긁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래서 내
카드를 버리셨다고 이야기 했더니, 매우 미안해하면서 내 카드를 주워 다시 긁으려고 해서 좀 급하게 제지했다. 커피를 준비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준비된 내 커피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거 제 커핀데요.”
“아... 죄송해요. 금방 다시 해드릴게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점장님이 술이 조금 깨기 시작하셨는지 얼굴이 빨개지셨다. 조금 놀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짓궂게 굴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는 사실에 아쉬워해야 했다. 그래서 그냥 빤히 쳐다보기로 했다. 내 시선에도 충분히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서 만족할 수 있었다.
안전하게 내 커피를 확보하고 다시 흡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점장님도 커피를 들고 나를 따라서 흡연실로 오셨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려는데, 점장님이 앞쪽 테이블에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으셨다.
“죄송해요. 담배 좀 필게요”
“이미 입에 물으셨는데요.”
“그게... 우...”
“새벽에 과음을 하셨죠.”
“술 냄새 많이 나요?”
별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웃어주고 나도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잠깐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기억할
것 같지 않았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끝.